‘어머니의 품’이라는 한민족의 상징적 산이자, 대한민국 국립공원의 시발점이기도 한 지리산. 한민족에게 지리산은 그냥 단순한 산이 아니다. 지리산은 그 자체로 역사요, 신앙이자, 애틋한 삶터였다. 그 크고 넉넉한 품 덕에 구석구석 삶과 역사의 고단함에 쫓긴 이들이 찾아든 아픈 흔적도 무수히 많다.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진적 의식이나 전문적 지식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기였지만, 국립공원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그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지리산이었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정부에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하고, 1964년 구례군민들이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등의 자발적 움직임 끝에 지리산은 1967년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거대하다. 그 속에 스며있는 민족의 삶과 애환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지리산은 3개 도와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5개 시·군을 포함하는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 능선의 거리가 25.5km로 60여 리가 되고, 둘레는 320여 km로 800리에 달한다.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의 3대 주봉을 중심으로 1,5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된다. 그에 따른 능선 사이사이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 피아골, 뱀사골 등 큰 계곡이 흐르고 있으며,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봉우리나 계곡도 많다. 지리산(智異山)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라는 뜻으로 전해진다. 옛날에는 저 멀리 ‘백두산(白頭山)이 백두대간을 따 라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백두의 정기를 이어온 산답게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민족적 숭앙을 받아 온 영산(靈山)이기도 했다. 이에 천왕봉에는 1,000년 전에 성모사란 사당이 세워져 성모석상이 봉안되었으며, 노고단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다.
구례 연하반은 1955년 구례중학교 교사 우종수씨를 비롯한 교직원들과 구례군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지리산 권역 최초의 산악회였다. ‘연하(烟霞)’는 안개와 노을을 뜻하며, 1967년 지리산의 국립공원 지정에 맞춰 ‘지리산악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구례 연하반은 지리산을 방문한 연구위원회 조사단을 안내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지리산을 함께 오르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지리산은한국전쟁, 빨치산 토벌, 도벌(盜伐) 등으로 산림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구례 연하반은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노고단-반야봉-천왕봉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종주 코스를 개척하며 지리산 훼손의 심각성을 깊게 느끼고 있었다. 이에 조사단을 안내하는 중 김헌규 박사를 만나 훼손되고 있는 지리산의 문제점을 토로했다. 1963년 김헌규 박사와 구례 연하반의 이 같은 만남은 문제점에 대한 공유와 해결을 위한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헌규 박사는 구례 연하반을만난 자리에서 ‘지리산 생태계의 자연을 영구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선진국 전례로 미루어 보아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아 정부 책임하에 관리 수호하는 것이다’(〈지리산과 구례 연하반〉 91p, 태학사 刊)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구례 연하반은 이 의견에 크게 공감했고, 구례군 관내 관공서와 지역 유지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해 1963년4월 ‘구례지역 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추진위원회는 1963년 12월에 완료된 조사단의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앞서, 1963년 9월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하는 ‘지리산 국립자연공원추진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한다. 하지만 조사단의 보고서와 추진위원회의 건의서를 바탕으로 한 국립공원제도 도입 요청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립공원 지정의 긍정적인 효과와 지역주민들의 바람을 확인했지만, 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수립,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이은 제3공화국 출범 등 당시 복잡한 정치 여건상 이를 당장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던 것이다. 유보된 논의가 다시 탄력을 받은 건 건설부에 국립공원 추진 관련 업무부서인 공원과가 설립된 1965년부터이다. 추진위원회는 이를 기회로 정체된 추진운동을 재개해, 1966년 3월 두 번째의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한다. 국립공원 제도 도입과 지정을 위한 전담부서, 당위성, 지역주민들의 찬성 등 모든 조건이 구비된 이후에는 막힘이 없었다. 1967년 3월 법적 근거가 되는 「공원법」이 제정되었고, 1966년 6월 부터 실시된 ‘지리산국립공원 기본조사’는 1967년 9월 이에 대한 보고서가 발간되며 국립공원지정을 위한 기본자료가 마련되었다. 앞선 기본조건들을 근간으로 1967년 11월 제1회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지정·결의 후, 마침내 1967년 12월 29일 지리산이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63년을 기점으로 구례 연하반과 당시 8만 명의 구례군민이 합심하여 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더구나 경직된 1960년대의 정치·경제·사회 상황 아래 아직 중앙정부에는 전담부서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 주도로 국립공원 추진운동을 진행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수 있다.
지리산의 국립공원 지정, 아니 어쩌면 더 나아가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도 도입에 있어 ‘구례 연하반’과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보다 먼저 활동을 시작한 구례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가 갖는 의미는 깊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국립공원제도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미국 제30대 대통령이었던 캘빈쿨리지의 아들이자 국립공원에 조예가 깊은 해롤드 쿨리지(Harold J. Coolidge) 박사와 클리랜드(Raymond W.Cleland) 박사 등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관련된 국제 교류 차원에서 방한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은 낙후되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한 관광 진흥 정책의 하나로 국립공원제도 도입을 권고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과 국토개발 계획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국립공원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건축가 김중업 씨와 농학자 김헌규 교수를 1962년 제1차 세계국립공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3년 봄, 김헌규 박사는 ‘지리산지역종합개발 조사연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지리산 탐방길에 올라 ‘구례 연하반’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