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해발고도 1,915m로서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가장 높은 산이며, 백두산과 함께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지리산의 산 이름은 '넓어서 지리하다', '둘러쳐져 있다'라는 한글을 지리, 두류 등의 한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하면 '지혜가 달라진다', '어리석은 사람도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해설하고 있다. 또, '백두대간의 맥이 다시 솟은 곳'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불리기도 했고, 도교의 영향을 받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의 방장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산이다. '어머니의 품'이라는 한민족의 상징적 산이자, 국립공원의 시발점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역시요, 신앙이요, 애틋한 삶의 터전이다.
이 땅이 생기고 산이 솟고 지리산이 자리를 잡은 이후 그 오랜 세월, 그리고 지리산이 사람과 생물들을 품에 안은 이후 오랜 시간, 우리에게는 지리산이 있었다.
지리산과 함께 사는 사람들, 지리산을 살리는 일에 나서다
일제강점기의 자연자원수탈과 불법 산림 도벌 등으로 인한 훼손이 심각해지자 지리산의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자원을 지키고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모색되었다.
구례 연하반 회원들과 국립공원 전문학자 김헌규 이화여대 생물학과 교수는 간담회를 통해 '지리산 살리기' 방안을 논의하였고, 김교수는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을 제시했다.
국립공원은 국가의 자연과 경관을 대표하는 곳을 국가가 법으로 지정하여 유지하고 관리하는 공원을 말한다.
연하반 회원들과 김헌규 교수가 지리산 기슭에서 논의한 지리산 국립공원이라는 화두가 처음 제기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지리산에 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남달랐다.
1915년 3월 나카이 다케노신이 펴낸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는 일제강점기 최초 지리산 조사 문헌으로 지리산 식생 현황 및 식물 상세 목록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1926년 경성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금강산에 각종 관광시설을 추진한다는 일본인 학자 타무라의 주장이 실렸으며, 1930년 동아일보에도 조선총독부의 국립공원 지정 준비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금강산외에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국립공원 대상지 중 하나가 바로 지리산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이처럼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을 추진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구상이 있었지만 실제 시도에 나선 것은 바로 지역민들이었다.
구례군민들은 1936년 지리산 개발과 등산로 확장 등을 요구하며 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5년 타무라 박사 등을 시켜 지리산 일대를 조사했고, 현지답사를 통해 등산로 확장과 편의시설 설치를 협의했다.
하지만 중일 전쟁 발발과 제2차 세계대전 개전으로 전쟁에 몰두하게 되며 지리산 국립공원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1963년 1월, 당시 군사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위원회 박정희 의장은 지리산지역개발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산지 개발에 나설 것을 특별지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인 대규모 산지종합조사였다.
현지 조사 결과를 토대로 1963년 12월 28일 총 70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지리산 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지리산 지역의 자연, 인문 환경이나 산업, 문화, 생태, 사회 관련 부문의 세부적인 조사 결과와 개발 이용계획을 제시하여 이후 지리산지역 개발을 위한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지리산지역 개발조사를 통해 국립공원 지정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1963년 10월 24일 미국 국립공원설계전문가 윌리엄하트가 방한하여 2주간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을 답사 조사하였다.
윌리엄하트는 연하반의 안내를 받아 노고단, 반야봉, 피아골계곡 등을 현지답사 했으며, 조사를 마친 후 지리산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지리산은 산세가 매우 웅장하면서도 그 경관이 수려하며, 수림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광활한 원시림의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하여 국제적 수준으로도 매우 훌륭한 국립공원의 후보지이다."
연하반은 군민 다수의 찬성 여론을 조성하였고, 1963년 4월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립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구례군민 극빈층을 제외한 약 1만가구는 각 회비 10원씩을 자진 갹출하였고, 4월 말, 군민들의 성원을 가슴에 새기며 군민 대표 5명은 서울로 올라가 당시 혁명정부를 방문하여 건의문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지리산의 자연보존을 위해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더불어 5월 국립공원추진위원회 의원들이 참여한 구례지구 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지리산 국립자연공원 추진 건의서(1963년) 중 일부 발췌
- 지리산의 풍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것이라고 경탄을 발하였고 울밀한 원시림! 철쭉꽃으로 덮힌 분홍빛 평원! 이 산록과 산곡마다 자리잡은 불교문화의 유산인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이 고찰에 묻힌 국보보물, 기념물들!
- 그야말로 지리산은 하나의 자연박물관을 이루고 있어 국립자연공원으로서의 개발조건을 우수하게 갖추고 있으며...
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건의서와 지리산지역개발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지리산국립공원을 지정요청 하였지만, 당시 복잡한 정치 일정상 추진에 어려움이 따랐다.
1965년 건설부 내 국토계획국 지역개발과가 설립되면서 유보되었던 국립공원 지정 논의가 다시 탄력을 받았고, 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는 약 3년 동안 정체된 추진운동을 재개하여 1966년 3월 두번째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 때도 역시 군민회원 1만 가구당 20원씩 자진 갹출하여 군민 대표들의 교통비 등 제반경비를 충당하였다. 당시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서 지리산을 보호하고자 하나로 모인, 참으로 값진 마음이었다.
정부는 국토계획국 지역개발과를 통해 공원법 제정 기초작업에 착수하도록 지시했고, 1967년 2월 6일 국회를 통과하여 그해 3월 3일 법률제1909호로 공포되어 우리나라 국립공원제도의 틀이 잡히게 되었다.
1967년 6월 17일 공원법 시행령이 공포되고 7월 10일 공원법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공국립공원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가 완비되었다. 이후 1967년 11월 20일 당연직 위원 8명, 민간인 위원 8명 등 총 16명의 국립공원위원이 임명위촉되었고, 1967년 11월 24일 제1회 국립공원위원회 회의에서 지리산을 제1호 국립고원으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국립공원 경계 설정을 위해 다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문제를 위임하였고, 12월 2일 민간인 위원들로 구성된 소위원회는 회의를 통해 해발 700m 이상 지역 전체를 포함하는 국립공원으로 책정한 원안을 확정했다.
이후 국토종합계획 심의회에 상정되어 12월 27일 통과되었고 1967년 12월 29일 건설부장관 공고에 의해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지리산국립공원이 탄생했다.
대한민국 제1호 국립공원 지정은, 무엇보다 구례연하반과 구례군민이 합심하여 민간주도로 국립공원 추진운동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컸다.